구평동(舊平洞)은 구서평(舊西平), 구시평, 구평이라 불렀으며, 조선(朝鮮) 초부터 만호영(萬戶營) 즉 서평포(西平浦)가 설치되어 군사상의 요충지였고, 독지장(禿旨場)이 섰던 교역의 중심지였다. 구평동은 동북으로 감내포(甘內浦 : 大浦灣)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티산(金峙山)이 우뚝 솟아 괴정, 신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송반도(頭松半島)가 남쪽 바닷가로 돌출하여 다대동과 이웃하고 있어서 해륙(海陸)의 요충지(要衝地)이다.
구평동의 성개(성포)는 구평동 동남쪽에 설치된 개(城浦)로써 성(城)이 있었으며, 최근까지 토성지(土城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토성이 언제 쌓아졌고, 진성(鎭城)이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성의 축조 상태와 거기에서 출토된 신라 시대의 토기편으로 보아 아마 신라 때부터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평포진(西平浦鎭)은 세종 때까지만 하여도 부산 첨사영(僉使營)에 속한 하나의 작은 보성(堡城)에 지나지 않았다.
이웃의 다대진(多大鎭)이 만호영(萬戶營)에서 첨사영으로 승격되어 무관(武官) 당상관(堂上官) 정삼품(正三品)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임명된 데 비하여, 무관 종구품(從九品)의 권관(權官)을 수장(守將)으로 한 초라한 진보(鎭堡)였다. 서평포가 신설된 것은 중종(中宗) 5년(1510) 삼포(三浦)의 왜란(倭亂)에 이어 중종 19년(1519)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난 후 진관제(鎭管制) 개편의 필요성에 따라서였다.
서평포는 이웃에 설치된 왜관(倭館)과 가깝고, 왜선(倭船)과 인원의 출입 점검 등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요지(要地)였다. 서평포 만호(萬戶)는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상비군(常備軍) 편성에서 좌사파총(左司把摠 : 多大鎭僉)에 딸린 좌초관(左哨官)이었다.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시에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한 왜병(倭兵)의 일부가 서평포를 함락하였다. 서평포는 해륙(海陸)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왜병과의 전투는 치열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구전(口傳)도 없으므로 누가 어떻게 지켰고, 어떻게 싸우다가 함성(陷城)이 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서평포의 주민과 성(城)의 군인들 모두 처절한 싸움으로 전사하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 해전(海戰)에 출병했던 이 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이 서평포 앞 바다에서 왜병 대선(大船) 9척을 무찌른 전과(戰果)가「충무공전서」에 기록된 것을 보아도 이곳은 격전지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 성(城)이 잔폐(殘廢)하여 진보(鎭堡)를 유지할 수 없어서 다대진의 성안으로 이진(移鎭)하였다가, 현종(顯宗) 9년(1668) 다대포성이 좁아 다시 서평포로 환진(還鎭)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성을 못쓰게 될 만큼 격전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종(肅宗) 3년( 677) 서평포진이 왜관(倭館)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수장(守將)의 관계(官階)가 낮아 체통이 서지 않는다고 하여 무관 종4품(從四品)의 만호(萬戶)를 수장으로 하는 만호영(萬戶營)으로 승격되었고, 만호 밑에 군관(軍官) 8명, 진리(鎭吏) 6명, 지인(知印) 3명, 사령(使令) 2명을 두었다. 그리고 서평포의 병선(兵船)으로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侯船) 2척이 있었고, 수군 1,081명, 무학사부(武學射夫) 118명이 있었다. 이밖에 서평포진에는 선재(船材) 조달을 위해 벌목(伐木)을 금하는 1개소의 봉산(封山)을 가지고 있었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 따르면 17세기를 전후하여 독지장(禿旨場)이 개시(開市)되었다고 하는데 장(場)이 섰던 자리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1일과 6일에 개시(開市)되어 사하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장림에서 생산된 소금, 그리고, 수공업품 등이 물물교환이나 미포(米布) 또는 전화(錢貨)에 의하여 교역되었다. 독지장은 동래, 부산, 좌수영장과 함께 조선 중기에는 유명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독지리(禿旨里)의 범위를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래읍지에 사천면(沙川面) 하단(下端)이 신초량리(新草梁里), 구초량리(舊草梁里), 대티리(大峙里), 목장리(牧場里), 감천리(甘川里), 독지리(禿旨里), 장림리(長林里), 다대리(多大里) 등 9리(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서평포를 독지리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구평동은 성개에서 해안선을 따라 산을 넘어야 갈 수 있는 두송반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여 뚜렷한 발전을 못하고, 조용한 어촌으로 형성되어 왔었다.
마을까지 겨우 찻길이 닿은 것으로 일제시대 일본군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하였기 때문에 군사도로가 개설되었던 것이다. 구평동은 어촌 마을이기 때문에 당집이 있으며, 산신도를 걸어둔 신당이 있고, 부락의 일년 동안 안강(安康)을 축원하는 동시에 동구(洞口)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마을에는 바닷가에 용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있으며, 이 굴이 신평동 뒷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굴을 용머리로 보고, 신평동 뒷산을 용의 꼬리로 보는 전설이 전한다.
구평동에는 극동철강(현재 한보철강)이 들어서고, 여러 공장이 이사를 와 자리를 잡고 세워졌고, 1977년에는 해안도로를 폭 4m로 넓혀 교통문제를 해결하여 살기가 편리해지자 발전하기 시작했다. 구평동 어항도 정비되었고, 더구나 감천항이 부산항의 보조항으로 개발되면서 많은 바다가 매립되어 감천항 배면도로와 배후가 건설되고, 관세자유지역으로 조성되는 등 지역개발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구평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전술한 바와 같이 구서평, 구시평 또는 줄여서 구평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9)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평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사하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12월 15일 사하구청 승격으로 사하구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