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동(新平洞)은 망끼, 망후, 동메 등의 옛 이름이 있었으며,「新坪洞」이라고 기록된 예도 있다. 망후촌(望後村)이란 유래는 임경업(林慶業)장군의 조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는 구전(口傳)에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임경업 장군이 영의정(領議政)이던 안동(安東) 김(金)씨 김자점(金自點)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을 당하였을 때 임장군의 조카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義州)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올까봐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망후촌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또, 다른 측면은 신평동이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망후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하는 향토 연구가도 있다.
즉, 다대진(多大鎭)의 후망소(侯望所)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아 망후촌이란 여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견해이다. 다대진은 원래 신평동 마을 앞 장림동(長林洞)에 있었으며, 옛날에는 이 마을도 다대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어쨌든 후자의 설(說)이 맞는다면 요새(要塞)에 어울린 흥미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신평동 뒷산에 고석암(孤石岩)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임경업 장군의 호가 고송(孤松)이기 때문에 그 집안과 관계있는 전설이 아닌가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평동과 임경업 장군 집안과는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평동 뒤에는 북산 즉 호복구(虎伏口)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북쪽의 강한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는 낙동강(洛東江)의 만입(灣入)으로 간척지(干拓地)가 전개되어 밝고 따뜻한 마을이다.
마을 앞에 독뫼(獨山)라고 불리는 외딴 동산이 있었다. 지금은 주택과 상가건물이 들어서서 원형을 잃었지만, 이 독뫼로 건너가는 입구에 예로부터 조개모래라고 부르는 땅으로 많은 비가 내려도 쉽게 마르는, 바꿔 말하면 배수(排水)가 잘되는 땅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넓은 마당을 닦아 놓고 타작을 비롯하여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했었다. 이곳이 바로 기원 1세기경의 김해문화기(金海文化期)의 패총이다. 패총 주변에는 조개껍질이 쌓여 패각층(貝殼層)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회(石灰)공장에서 일대를 파헤쳐 패각 수십 트럭을 운반해 가버렸고, 토목공사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신평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패총을 남긴 기원 1세기경부터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939년 신평동에서 장림동까지 직선으로 제방을 쌓아 강의 만입부(灣入部)가 농사지대로 변했지만, 그 전에는 이곳이 간사지(干瀉地)로서 많은 어패류(魚貝類)가 잡힌 곳이었다. 이후부터 신평동에서 장림동까지 넓은 농토를 얻게 되어서 어업보다는 농경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
신평에서 괴정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배고개, 배오개, 이티라고 부르며 이현(梨縣)으로 쓰고 있다. 이 고개에 배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배(梨)하고는 상관없는 말이 아닌가 한다. 동쪽에 있는 고개이므로「 고개」의 「」에서「배」로 전음(轉音)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개는 선사시대의 신평 패총인과 괴정동 패총인이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는 하단장과 부산장, 그리고, 구평동의 독지장을 보러다니는 장꾼들이 넘어 다녔던 유서깊은 고개이다. 또, 배고개 골짜기를 삼밭골이라 부르며, 옛날부터 삼을 많이 갈았다고 전한다.
신평동 산기슭에서 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면, 변한시대부터, 가야, 신라, 고려를 통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다른 마을보다 전설도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마을 아래쪽 낙동강변에「초본고」라고 부르는 곳에 나루터가 있었으며 김해 명지(鳴地)로 왕래하는 도선장(導船場)이었다.
1960년 5월에 550세대 삼천명쯤이 신평동으로 옮겨 왔다. 1959년 9월 17일에 부산을 휩쓴 태풍 사라호로 28명이 죽고, 오천 명쯤이 다쳤고, 삼천 육백 채가 넘는 집이 완전히 부숴졌었다. 특히 서구 남부민동, 영도구 남항동 같은 곳이 피해가 컸는데 그곳에는 바람과 해일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이 이듬해 5월에 이곳 신평동으로 옮겨와 한 세대마다 일곱 평 남짓한 집을 짓고 살게 되어 조용하던 토착민의 마을에 변화가 왔다.
또, 1968년 3월에 서구 충무동의 바닷가 둑을 고쳐 쌓을 때에 집을 뜯긴 사람들의 1,630세대도 이사를 와 열 다섯평의 집들을 짓고 살았다. 그때부터 신평동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1967년 10월 2일 신평초등학교가 세워졌고, 길도 포장되어 큰 동네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81년 5월부터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조성한 신평ㆍ장림공업단지와 한국수자원공사에서 낙동강하구둑 매립지내에 1987년 11월에 조성한 중소기업협업단지에 많은 공장이 이사를 왔고, 사람들도 따라와 신평동은 새로운 공업단지 주변의 마을로 번창하였고, 또한 1994년 6월에 개통된 지하철 1호선 연장구간의 종점역인 신평지하철역이 신평새동네(낙동강하구둑건설관련 이주민 주거단지)앞에 세워짐으로써 교통이 편리하여 주변에 신익APT 등 대단지 APT가 들어서는 등 앞으로도 많은 발전이 기대되는 것이다.
신평동은 원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망끼, 망후 또는 신평이라 불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평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따라 사하에 편입되었다. 1992년 9월 1일 구 조례 제242호로 신평동이 신평제1동과 신평제2동으로 분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