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다다라(多多羅)·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는 것
다대 1동, 다대 2동
다대동(多大洞)은 낙동강구(洛東江口)에 자리잡고 있어 옛날부터 국방의 요새지로 주목을 끌어 온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자비왕조(慈悲王條)의 기록을 보면 5년 여름 5월 왜인이 활개성을 쳐서 사람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6년 봄 2월 왜인이 삽량성(梁山)에 침입했으나 패하여 달아났다. 17년 일모(一牟)·사호(沙戶)·광석(廣石)·답달(畓達)·구례(仇禮)·좌라(坐羅) 등 성(城)을 쌓았다.
<五年夏五月 倭人襲破活開城 虜人一千而去 六年春二月 倭人揷良城 不克而去 十七年 築一牟·沙戶·廣石·畓達·仇禮·坐羅等城...>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답달(畓達)은 다대(多大)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답달」의「답(畓)」은 인마잡답(人馬雜畓)으로 거듭(重)을 의미 또는 현(顯) 저(著)를 의미하며, 오늘의 다대(多大)의 뜻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