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 객사는 1972년 6월 22일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객사란 조선시대 지방 관아(官衙:관청) 건물의 하나로 수령(守令)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궁궐)을 향해 망배(望拜)를 드리던 곳으로 근엄하게 지어져 사신(使臣)이 있을때는 그 사신의 숙소가 된 곳이다.
조선시대에 부산에는 다대포첨사영 이외에도 부산진성 안에 공진관이란 이름의 객사와 지금의 수영인 옛 좌수영에 영파당(寧派堂)이란 이름의 객사가 있었고, 동래부에 봉래관(蓬萊?)이라 이름한 39간(間)이나 되는 객사가 있었다. 그리고 초량왜관에 왜관으로 오가는 사람을 위해 대동관이란 객사에 조선왕조 건국 이래의 역대 국왕의 전패(殿牌)를 봉안하고 있었다.
그때는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이 전패에 먼저 예를 올려야 했다. 위에 말한 객사들은 지금으로부터 90년 이전(한일합방 이전) 또는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부산에 모두 다 있었으나 지금은 다대포진 객사만 남아 있다.
다대포진 객사가 남아 있다 해도 지붕과 기둥과 밑뿌리의 하방(下防)만 남아 있을뿐 벽체는 허물어진 뒤다. 그때 회원관이라 불린 이 객사도 본디의 다대포진이었던 지금의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1970년 몰운대 현재의 자리에 원형그대로 이전 복원 된 것이다.
한데 다대포를 비롯한 남해안은 예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곳이다. 그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의 절도사영을 두었는데 조선조 초기의 다대포영은 부산포절제사영 휘하의 만호영(萬戶營)이었다. 그때는 장림포(長林浦)에 있었다. 그 뒤 다대포로 옮겨지고 명종이후 다대포 만호영은 부산포와 같은 진(鎭)으로 승격되었다. 임진왜란 이후는 부산포진과 함께 그 중요성에 비추어 딴 진보다 2배의 병선을 가지게 되면서 다대포진의 첨사는 북경(北境)의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와 같이 정 3품 당상관이 임명되었다.
이 다대포진 객사의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1970년 몰운대로 옮겨지고는 산꼭대기에 벽체가 없이 서서 누대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대티고개밑에서 나온 석관묘로 보이는 유적에서는 무문토기에 단(丹 : 붉은)을 칠하고, 광택을 낸 단도마연토기 한점과 마제석검 한점, 마석촉 세점, 미완성 석촉 두점이 출토되어 무문토기와 함께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무문토기에 단을 칠한 완형토기가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예는 별로 없었으며, 이 토기는 이른바 일본의 야요이식 토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어서 선사인과 섬나라 일본과 연관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국가유산명 | 현황 |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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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 동헌 | 다대동 산144(몰운대) 위치 부산시 지정 문화유산제3호('72.6.22) 지방 관아 건물의 하나로 수령이 대궐을 향해 망배 드리던 곳 창건 연대 미상 (1825년 중순) |
조선시대 |